발표자를 정하고 나면 회의실에 잠깐 정적이 흐른다. “그럼 순서는 어떻게 할까요”라는 질문에 아무도 먼저 손을 들지 않는다. 발표 자체보다 순서를 정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리는 회의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첫 번째와 마지막은 같은 자리가 아니다
발표 순서는 겉보기엔 숫자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손해가 고르지 않게 나뉜다. 첫 번째로 나선 사람은 비교할 대상이 없다. 평가자도 아직 기준을 세우지 못한 채로 듣는다. 잘해도 “다음 사람이 더 잘할 수도 있으니” 하는 유보가 붙고, 못하면 “역시 처음이라 어수선했다”는 인상이 오래 간다. 반대로 마지막 순서는 비교 기준은 충분히 쌓였지만 청중이 지쳐 있다. 집중력이 이미 앞선 발표들에 소진된 뒤라, 내용이 좋아도 반응이 무디게 나온다.
가운데 순서가 안전하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 비교 대상도 있고 청중도 아직 지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유리하지만, 앞뒤 발표에 묻혀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손해가 새로 생긴다. 결국 어느 자리든 나름의 손해가 있고, 그래서 아무도 스스로 순서를 고르려 하지 않는다.
손을 들어보라고 하면 오히려 늦어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먼저 하실 분?” 하고 물으면 대개 역효과가 난다. 손해를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먼저 나서지 않는다. 침묵이 몇 초 이어지면 그 자체가 부담이 되어 아무도 더 나서기 어려워진다. 결국 진행자가 눈이 마주친 사람, 또는 가장 만만해 보이는 사람을 지목하는 것으로 끝난다. 지목받은 사람은 자원한 게 아니라 떠밀린 것이므로 시작부터 기분이 좋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시간이다. 순서를 정하는 데 쓰는 시간이 정작 발표 하나의 시간보다 길어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다섯 명이 발표하는 자리에서 순서 정하기로 5분을 쓰면, 그 5분은 어느 발표에도 도움이 되지 않은 채 그냥 사라진다.
사다리가 맞는 이유
이 문제에는 한 명을 뽑는 도구가 아니라 전원에게 자리를 하나씩 주는 도구가 필요하다. 룰렛으로 “1번 발표자”를 뽑고, 다시 돌려서 “2번 발표자”를 뽑는 식으로 반복하면 뽑을 때마다 남은 후보가 줄면서 확률이 계속 바뀐다. 게다가 마지막 한 사람은 뽑히는 과정 없이 자동으로 남는 자리에 배정된다 — 그 사람만 랜덤을 거치지 않은 셈이라 결과에 승복하기 어렵다.
사다리타기는 이 조건을 한 번에 만족한다. 참가자 줄과 순서 줄을 나란히 세우고 한 번 돌리면, 모든 사람이 어느 순서든 하나씩 배정된다. 빠지는 사람도 없고 두 순서를 동시에 맡는 사람도 없다. 결과가 나온 뒤에는 화면에 남은 사다리 그림을 따라가며 왜 이 순서가 나왔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손 드는 방식이나 룰렛에는 없는 부분이다.
정했으면 지킬 것
사다리를 돌리기 전에 순서를 바꿔야 할 사정이 있는 사람은 먼저 걸러둔다. 회의 중간에 급하게 나가야 하는 사람, 다음 일정 때문에 일찍 발표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순서는 사다리 밖에서 미리 정하고 나머지만 돌린다. 결과가 나온 뒤에 “저는 사정이 있어서요”라며 순서를 바꾸기 시작하면, 그 뒤로는 사다리를 왜 돌렸는지 알 수 없어진다.
일단 나온 순서는 그대로 진행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시 돌리면 다음번부터는 아무도 결과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링크로 결과를 공유해두면 자리에 없던 사람도 자기 순서를 미리 확인할 수 있고, 사다리 그림이 남아 있으니 나중에 순서를 두고 다툴 일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