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점심 메뉴는 매번 안 정해질까
“아무거나”는 정말 아무거나 괜찮다는 뜻이 아니다. 고르기 싫다는 뜻이다.
메뉴를 정하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다. 어려운 건 그 뒤에 붙는 것이다. 내가 고른 집이 맛없으면 그날 점심은 내 탓이 된다. 웨이팅이 길어도 내 탓이고, 자리가 좁아도 내 탓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에 매번 그 부담을 지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래서 다들 한 발씩 뒤로 뺀다.
랜덤이 통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결론은 나오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맛없으면 룰렛 탓이다. 결정을 회피하는 게 아니라, 회피하고 싶은 부분만 정확히 덜어내는 방법이다.
인원수에 따라 접근이 다르다
2~3명이면 후보를 세 개까지만 줄인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좋을 것 같지만 반대다. 후보가 여덟 개쯤 되면 “그건 어제 먹었잖아”, “거기 오늘 쉬는 날 아니야”가 나오고 결국 처음부터 다시 고르게 된다. 사람이 적을수록 서로의 취향을 이미 알고 있어서, 후보를 좁혀두는 편이 빠르다.
4~6명이면 못 먹는 것부터 뺀다. 알레르기, 종교, 어제 회식으로 물린 메뉴. 이걸 먼저 제거하면 후보가 알아서 절반이 된다. 좋아하는 걸 모으는 것보다 못 먹는 걸 빼는 쪽이 빠르고 갈등도 적다.
7명 이상이면 메뉴가 아니라 식당을 뽑는다. 인원이 많으면 애초에 자리가 있는 곳이 몇 군데 없다. 메뉴를 먼저 정해봐야 그걸 파는 집 중에 우리를 받아줄 곳이 없으면 소용없다. 순서를 뒤집는 게 맞다.
상황별로 쓸 만한 후보 목록
회의 전, 빨리 먹어야 할 때
국밥 · 덮밥 · 김밥 · 칼국수
주문하고 나오는 속도가 빠른 것들이다. 고기를 구워야 하거나 조리 시간이 긴 메뉴는 이 목록에서 뺀다.
회식 다음 날
콩나물국밥 · 순두부찌개 · 쌀국수 · 우동
뜨겁고, 국물이 있고, 맵지 않은 것. 해장은 자극이 아니라 온도로 한다.
손님이나 상사가 있을 때
한정식 · 초밥 · 정갈한 백반 · 샤브샤브
맛있을 확률보다 실패하지 않을 확률이 높은 쪽을 고른다. 자리가 조용한지도 함께 본다.
더운 날
냉면 · 밀면 · 콩국수 · 메밀소바
추운 날
부대찌개 · 감자탕 · 수제비 · 갈비탕
뽑고 나서 뒤집지 않으려면
랜덤의 규칙은 하나뿐이다. 돌리기 전에 합의하고, 나온 뒤에는 안 바꾼다.
한 번이라도 “이건 다시 돌리자”가 나오면 그다음부터는 아무도 결과를 믿지 않는다. 마음에 안 드는 게 나올까 봐 불안하다면, 그건 랜덤이 잘못된 게 아니라 후보 목록이 잘못된 것이다. 넣지 말았어야 할 메뉴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돌리기 전에 한 번만 물어보면 된다. 여기서 뭐가 나와도 괜찮은가.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 그때 돌린다.